온 국민이 이렇게까지 종교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을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신천지라는 소위 이단종교를 한국 사회에 대대적으로 드러냈다.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은 신천지에 대해 한두 마디씩이라도 거들고 있다. 나는 종교와 거리를 둔 지 너무 오래되었고, (특히 신천지는 비교적 최근에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었기에) 오늘날 종교 상황을 논하기에는 감이 떨어져있다. 그럼에도 이 시국에 한국 사회가 종교를 다루는 방식이 마음에 걸렸기에, 이번 기회에 말 한 마디라도 보태보고자 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10년 전 신학 공부를 하며, 종교에 매우 관심을 가졌었다. 특히 이단 종교에 대해서 덕질 하듯이 분석도 했었다. 가까운 친구가 이단 교회에 다녔던 이유도 컸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단종교로 모였기 때문에, 인권의 이슈와 무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도, 정책, 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탁상공론처럼 보이는 종교에 대해 점점 거리를 두었다. 멋진 문장을 구사하며 세상의 진리를 해결할 것처럼 떠드는 것도 싫었다. 나름 교회, 성당, 절을 가리지 않고 나가며, 종교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오랜 시간 고민을 했지만, 멀리하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당시의 고민이 이제는 완전히 잊혔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의 국면이 터지니, ‘제도는 나아갔어도 아직 사람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불현 듯 나에게 다가왔다.

 

왜 사람들이 신천지에 빠져들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충분한 대답이 각종 매체에 담겨있다. 가족에게든 직장에서든 무시당하며 살다가, 유일하게 세상에서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 자체로 약자에게는 축복이고 은혜이다. 심지어 종교 공동체는 실재하기 때문에, 마약이나 신기루 같은 환상도 아니다. 분명한 행운이자 축복이다. 심지어 사회 제도 및 문화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종교가 대신 포용하고 있으니,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그리고 시민사회에게나 긍정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그리고 이단 종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아무리 사회적 약자이자 일반인의 눈에 이해가 안 될지라도, 이들이 비이성적인 선택을 했다고 치부하거나, 주류 사회에 의해 구원 받아야 하는 사람들인지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세아니아 바누아투 섬존 프롬교의 일화가 있다. 존 프롬은 바누아투 원주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는 1930년대에 약 10년 간 원주민과 함께 동고동락한 뒤 섬을 떠나며, 다시 돌아올 때에는 큰 선물을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프롬은 섬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다. 프롬이 나타나지 않아도 원주민들은 자체적으로 경전을 만들어 언젠가는 그가 돌아와 섬을 낙원으로 만들어 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60년이 지나 한 기자가 존 프롬교의 모습을 보고 도저히 납득을 못하자, 섬사람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오기를 2천 년이나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존 프럼을 겨우 60년 기다렸다. 왜 우리를 보고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하는가?” 그리고 그들은 존 프롬과 함께 보낸 10년의 경험이 으리으리하게 부유하고 풍족한 것은 않았지만 분명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자산, 지식, 건강 등 이성적으로 생각하기에 사람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것들, 가령 프로축구팀이 골대에 골을 넣는다거나, 게임 캐릭터의 레벨이 오른다거나,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서 내가 아닌 허구의 인물에 감정 이입을 하거나 등등등개인의 삶에 어떠한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행위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두고 우리는 비이성적이라고 매도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행위에 몰두하고 있으며, 행복의 수단으로써 충분히 존중받는다.

또한 ‘144천명의 구원등 신천지 교리에 대해서도 비이성적이라 판단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소수만 구원받을 것이란 종교는, 유대교를 비롯해서 꽤나 많이 존재했다. 단지 대중종교가 될 것이냐, 소수의 응집력 강한 종교가 될 것인지에 대한 기조 차이 정도밖에 없다.

 

서두가 길었는데, 이야기하고 싶었던 질문은, 잘못과 책임이 무엇이고 누구에게 있느냐이다.

개인에게 있어서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 종교의 신앙을 가지는 행위가 비이성적인 선택도 아니고, 오히려 사회적 배제와 차별의 구조적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신천지에게는 문제가 없는 것인가 반문할텐데, 결코 신천지가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천지의 조직적 문제와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신천지의 조직적 문제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있다고 생각한다. 젠더 용어이긴 하지만, 종교든 사회운동단체든 확장을 필요로 하는 조직에서 흔히 보이는 문제이기도 하다. 유일하게 자신을 존중(다른 말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폭력적인 행위일 때,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른 교회에 몰래 잠입해서 신도를 빼오라는 요구가 혹자에게는 도저히 이해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사랑한 사람이 바라는 유일한 바람이고, 그 행위로 상호간의 사랑에 대한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다면, 아무리 폭력적인 요구일지라도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데이트폭력을 당하는 피해자에게 결코 비이성적이라고 비하하지 않듯이, 신천지 신도들의 자발적이면서도 폭력적인 행위가 단순하게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문제는 조직적으로 가스라이팅을 이용하는 신천지 조직 기획자들에게 있을 뿐이다.

결정적으로는 이단 종교에서 가스라이팅을 당하게끔 만드는 (너무나 진부한 단어인) 사회에 책임이 크다.

몇 년 전, 지인의 조현병 치료를 도운 경험이 있다. 조현병이 발발하면 환자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기 어렵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병이라, 가족이든 친구든 환자를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입원치료도 쉽지 않으며, 고액의 치료비용을 가족과 개인이 부담해야만 해서, 상당수의 조현병 환자들이 치료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니, 공동체에서는 계속 무시당하며 폭력성이 강화되고 만다. 진주에서 조현병 환자가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을 때, 너무나 예측가능한 일을 막지 못한 안타까움이 더 컸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돌봄과 지원을 통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만드는 제도와 정책은 충분히 많다. 정치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을 뿐이다. 또한 문제가 있는 종교 집단에 들어갔을지라도, 주변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고립시키지 않으면 그 사람들의 마음의 문이 닫히지 않을 수 있다. 문이 안 닫힌다면, 이단 종교에게만 의존할 이유도 없어진다. 결국 문제가 눈덩이처럼 커질 것을 알면서도 그동안 방치를 해온 사람과 제도에게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단 종교인들을 비하하고 비이성적이라 매도하는 지금의 혐오적 반응이 우려스럽다. 전염병에 대한 대응이 혐오에서부터 비롯된다면, 이단 종교의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이단 종교는 계속 땅굴을 파고들어가서 음지에 모습을 감춘 채, 폭력적인 행위는 이어지면서 전염병에 취약한 상태는 유지될 것이다.

이단 교회에 다니던 친구는, 절대 전도되지 않을 나에게 본인의 종교 이야기를 꽤나 많이 해 주었다. 나는 그 교회가 친구에게 주었던 안정감을 존중했고, 소수만 구원받는 믿음에 대해서도 딱히 비판하지 않았다. (그 신이 맞다면 그냥 내가 구원 안 받으면 그만이니깐) 어차피 전도는 안 되겠지만, 친구는 본인의 종교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나에게 마음을 열었고, 가끔 그 교회 사람들이 가스라이팅을 자행할 때마다, 토론을 통해 조금씩은 해결을 했다.

사회보장제도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정치와 사회운동의 영역에서 계속해서 해결해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단 종교에 대한 문제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단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중요하다. 사실 인간은 누구든 외롭지 않은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조현병이든 이단 종교든 요 몇 년간 사회가 다루어오는 방식은 너무나 두렵다. 시한폭탄처럼 문제를 놔둔 채, 타자화를 자행하며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문제는 하루 빨리 해결되어야 한다. 신천지를 비롯하여 집단 감염이 발생한 조직들은 코로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책임 있는 모습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전염병 해결을 넘어서, 그 뒤에도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들을 다시 방치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어차피 이단 종교를 믿던 사람들은 어디 다른 세계로 넘어가지 않는다. 나와 같은 공간에 존재하며 계속 살아갈 사람들이란 것이다. 제도도 중요하고, 시스템도 중요하고, 정책도 중요하다. (다소 휴머니즘 같은 뉘앙스지만) 그럼에도 사람이 있으니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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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구몬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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