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빛센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5.23 내가 익준을 좋아하는 이유
  2. 2020.03.14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올 해 초, 흔한 술자리의 풍경을 돌이켜 보면 드라마 <이태원클라쓰>를 빼놓을 수 없다. 1차를 가든, 2차를 가든, <이태원클라쓰>OST가 나왔다.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도 이 드라마로 흘러갔다. 특이하게도, 웹툰에서 이미 결말이 나왔다보니, 사람들이 딱히 스토리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개성 강한 캐릭터와 이를 잘 소화해내는 배우들의 연기가 주된 화두였다. (사람들마다 공감하는 캐릭터가 달랐는데, 이게 약간... 각자의 자의식과 자존감이 은연중에 드러나더라.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술자리에서 정치 얘기보다는 드라마, 그 중에서도 배우와 인물 얘기하는 것을 훨씬 더 선호하다보니, 여러모로 술자리를 즐길 수 있던 시기였다.

드라마 볼 때, 다양한 캐릭터의 매력이 살아있는 작품을 선호한다. 최애작으로 꼽는 <청춘시대>가 대표적이며, <그들이 사는 세상>, <추노>, <하얀거탑>, <이번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등등 드라마 추천해달라고 하면 주크박스처럼 늘어놓는 작품들의 공통점이, 남주/여주 뿐 만 아니라 주변 캐릭터의 매력이 터지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주인공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런 취향을 타다보니, 요새 바빠서 드라마를 거의 못 챙겨보더라도, <슬기로운 의사생활>(이하 슬의) 만큼은 놓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다섯 명을 병렬적으로 메인에 배치시킨 만큼, 스토리보다도 인물 중심의 드라마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에 대한 큰 기대 없이 사는 편이라, 개인의 삶에 서사를 지나치게 부여하는 것을 어색해 한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따위에 인생을 대입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드라마적인 서사에 개인의 삶을 빙의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주변인들을 엑스트라로 만드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경계한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드라마를 볼 때, '리얼리티'가 얼마나 구현되었는지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는다.

다만 드라마 속 '사람'에게는 눈길이 계속 간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층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고,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극적인 인격이 모든 사람들의 한 구석에는 당연히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각자 열심히 페르소나를 쓰고 노력하며 살고 있는데, 드라마에서라도 사람들의 가면을 여러 모습으로 벗겨주니 대리만족도 된다.(나름 드라마의 순기능이다!) 여타의 이유로, 드라마를 고를 때 자연스럽게 '여러 캐릭터가 매력적인가'를 따지게 된다.

 

<슬의>의 캐릭터들은 다양하고 매력적이다. 원픽을 하자면, 나는 익준(조정석)의 팬이다.(익준은 주인공이긴 하지만,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지는 않다.) 익준의 매력은 단순히 유머러스하고 긍정적인 캐릭터이어서는 아니다. 이혼을 당한 뒤 슬퍼하다가도, 나중에 비슷한 상황에 놓인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에너지를 전달한다. 압도적인 성과를 내거나 지위를 가지지는 못하지만, 가족이든 직장이든 친구관계이든 1인분은 충분히 해낸다. 시도 때도 없이 개그를 던지는 가벼움만을 보기에는 그는 훨씬 더 깊이가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많은 평론가들이 비슷한 리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캐릭터는 결코 아니다. 그래도 시청자들은 <슬의>의 현실성 없음을 탓하지 않는다. 아름답지만 허구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드라마가 애써 숨기지 않고 있기에, 누구도 리얼리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매주 에피소드가 업데이트 될 때마다, 오늘 익준은 어떤 모습을 보일지가 궁금할 뿐이다. 약간의 긍정적인 효과를 찾을 수는 있다. 마치 성당이나 절에 가서 선한 우주의 기운을 받아오는 것처럼, <슬의>를 통해 (특히, 나는 익준 캐릭터를 통해), ‘누군가에게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면서, 1인분의 역할은 해내고 싶다.’라는 때늦은 패기를 가지는듯해서 괜히 훈훈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슬의>를 즐겨보다가도 어느 순간에 감정선이 정지된다. <슬의>CJ ENM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CJ ENM과 나, 그리고 나의 형 한빛 PD 사이에 있던 과거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슬의> 자체를 둘러싼 이슈도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있다.

<슬의>1주일에 에피소드를 한 편씩 제작한다. 제작진은 '열악한 노동시간을 해결하기 위해 주2회 편성을 포기'했다며 대대적으로 마케팅했다. 이런 메시지를 듣고 있으면,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대단히 희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CJ ENM<쌉니다. 천리마마트> 등에서 주1회 편성의 시장성을 확인했다.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 시장이 커지고 본방사수는 줄어드는 추세에서, 2회 편성이 큰 메리트가 없다. 심지어 CJ ENM의 다른 드라마 현장은 아직까지 열악한 경우가 많다. <응답하라> 시리즈를 성공시킨 신원호 PD의 작품이기에, 딱히 손해 보지 않는 것이다. 메시지를 그럴싸하게 내놓는 CJ ENM의 위선이 달갑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주1회 편성은 드라마 종사자들의 꿈같은 요구였고, 우리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장시간 촬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슬의>의 메시지와 시스템 개선은 현장의 작은 변화가 이루어진 것임은 분명하다. 때문에 <슬의>에 대한 평가를 어찌해야할지 매우 혼란스러웠다. 공교롭게도, 혼란에 대한 해답은 <슬의> 속에서 찾았다.

 

"처음엔 자존심도 상하고 남들 보기도 너무 창피하고.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이 아까웠어요. 남편이 아니라 본인을 위해 악착같이 건강 회복하세요

 

바람 핀 남편이 준 간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삶의 의욕을 포기한 환자에게 익준이 건낸 말이다.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다. 열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현실이라는 곳은 드라마보다도 더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공간이다. <슬의> 제작 시스템의 변화는, 지금까지 방송 현장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 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1인분의 에너지를 전달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솔직히 저 방송국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슬의>의 익준인 것처럼 빙의해서 긍정해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드라마의 거대한 서사를 참고하는 것보다, 가면의 용도로 사람을 참고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나는 <슬의>가 주1회 편성을 통해 장시간 노동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 바를 환영한다. 이런 입장 변화가 대단히 어려운 일도 아니다. 또한 내가 입장을 바꿨다고 해서 사회에 영향을 주지도 그렇다고 안 주지도 않는다. 그냥 나만의 변화일 뿐이고, 나는 지금까지와 앞으로의 시간이 소중할 뿐이다.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에너지를 주면서, 1인분도 하고, 작은 성과도 내고 싶은데, 드라마 하나에 천착할 여유는 없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 속 캐릭터와 같은 가면을 쓰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혼란을 가져다준 <슬의>가 종영했다. 그래도 이 드라마가 현실의 사람들을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익준을 찍기 위해 카메라 뒤 사람들이 갈아졌다면,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훨씬 더 비극적인 작품이 되었을테니깐.

사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드라마는 언제나 기대가 된다. 하지만 한 명의 시청자로서, 그 기대보다도 슬픈 이면이 덜 보이는 촬영장을 더 간절히 바라고 있다. <슬의>가 시청자에게 좋은 에너지를 준만큼 부디 다른 드라마 촬영장에도 좋은 메시지가 되었기를.

 

Posted by 아구몬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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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보았다. 영화는 10월 26일 어떤 죽음의 의미를 관객들에게 확실히 각인 시키고자 했다. 매 년 10월이 되면 온 몸이 긴장으로 가득차는 나로서는, '10월 26일'이라는 글자가 영화의 의도대로 각인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이토히로부미나 박정희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기일이, 나의 친형 기일보다 중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에겐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한국이라는 공간은 죽음의 의미를 매우 무겁고도 거대하게 부여한다. 죽음의 무게감 '덕분에' 우리의 싸움은 수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한빛PD의 명예가 회복되고, 한빛센터도 출범하였다. 그리고 형은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PD 중 한 명이 되었다. (본인이 PD를 준비하며 꿈꾸었던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나 엄중한 무게감은 한국만의 유일무이한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을 만들고, 가족을 잃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투쟁 현장의 선두로 서게끔 만든다. 그들이 실제로 가족의 죽음을 '그런' 사회적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같은 무게로 느끼고 있는지, 고민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불합리한 죽음은 진실이 규명되어야 하고, 다시는 그런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구조가 개선되어야 한다. 또한 유가족들은 자발적 선택에 의해 투쟁에 나선다. 당연한 결의와 전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정말 서툰 부분이라고 한다면,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돌아보는데에 있다. 결국 길고 지리한 투쟁의 끝에는, 각자가 요구하는 죽음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가 남는다. 그 상처는 유가족이든 활동가든 시민을 가리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어려서부터 (다수의 한국 사람과는 다르게)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어쩌다 보니' 유가족이 되었고, 내 이성과 감정이 뜻하는대로, 그것이 형도 동의했을 법한 일이라면 그냥 필요한 일을 했다. 사회가 의미를 무겁게 부여하면 힘을 모아 무게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고, 그렇지 않아야 할 때에는 메마른 사람인 마냥 가볍게 넘겼다. 이런 '유가족' 같지 않은 태도는 세상 편하게 살아가기에는 매우 좋았지만, 떄로는 시민들에게든 다른 유가족들에게든 이질적인 존재로 분리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죽음의 의미가 무엇일지, 몇 천 번 반복했던 고민을 다시 하곤 했다.

요새 죽음을 많이 마주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죽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죽음도 있었다. 스스로 버텨내기 위해,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었고, 떠난 사람을 최대한 이해해보려고도 했었다. 마지막 순간의 공포를 넘어설만큼 쉬고 싶고 놓고 싶은 마음이었겠지.. 그냥 납득하는 순간도 많았다. 그래서 죽음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너무나 슬픈 감정이 차오르지만, 또 그만큼 그 행위를 인정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죽음엔 다층적인 상황이 겹겹이 쌓여 있기에, 함부로 해석을 하기도 의미 부여를 하기도 두렵다. 그렇기에 내가 좋아했거나 존중했던 사람의 죽음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작업을 할 때에는, 힘든 시간이지만, 매우 긴 호흡과 집중을 하게 된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었을까. 무엇을 사랑했을까. 왜 쉬고 싶었을까. 어차피 떠난 사람의 몫을 그대로 이어나갈 수 없으니, 먼 훗날 다시 만났을 때, 부끄럽거나 민망하지 않을 만큼 사는 건 어느 정도일까. 적어도 생전에 내가 그 사람에게 관심 가졌던 딱 그만큼만이라도 온전히 모습을 기억하고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작업을 이어가다보면 다행히도 과하게 슬프지도 지치지도 않게 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고인을 그리면서 '반갑게' 추모하게 된다. 죽음에 의미만 명료하게 부여하지 못할 뿐.. 그럼에도.. 떠난 사람들이, 사후에 좋은 의미를 찾아서 영향을 주기보다, 차라리 살아서 더 아름다운 기억을 주위에 남겼으면 좋았을텐데.. 이기적이지만 그랬다면 나는 더 행복했을텐데..

매년 10월 26일, 추모제를 한 해 한 해 지나보내며, 나는 더욱 굳어지고 있다. 좋은 말로는 단단해지는 것이지만, 그건 정말 원하지 않은 굳셈이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단단해지는 일 따위는 없었으면 좋겠다. 나에겐 추모만큼 중요해진 일이기도 하다.

Posted by 아구몬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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