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NGO 발언대] 4%만을 걱정하는 정치는 필요 없다 _ 이한솔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6280300055#csidx875e02bad1e8844b6ed2b1bdc89ef3b 

상위권으로 이뤄진 ‘심화반’ 학생이 ‘성적 향상은 내 자신의 잘못이 아니니, 심화반 교육비를 면제해달라’는 요구를 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일반반’ 학생은 심화반이나 사교육은커녕 일반 학비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말이다. 물론 고득점은 심화반 학생의 잘못이 아니다. 교육 ‘비용’을 ‘징벌’로 이해하면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심화반이라는 제도는 향후 성적을 높이기 위한 학교의 선별적 지원을 뜻한다. 비용에 상응하는 혜택을 받는 것이다. 상식적인 학교라면, 방과 후 교육 인프라를 더 제공하는 학생에게 비용을 ‘조금’ 더 받고, 학비가 부담되는 학생들의 교육비는 최대한 덜어주는 것을 선택할 테다. 이러한 상식은 국가에도 적용된다.

여당은 최근 1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를 상위 2%에게 부과하고, 1주택자의 양도소득세 비과세 기준의 경우 12억원으로 완화하는 정책을 당론으로 결정했다. 여당의 정책 결정권자들은 수없이 많은 민생 현안 중, 보유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이전까지는 내지 않던 종부세를 내야 하는 사람들의 과세 부담이 하필 걱정된 것이다. 현행대로라면 상위 4% 내에 해당하던 대상이 개정안을 통해 2%까지로 줄어든다. 여당은 대대적인 고심 끝에 자산 이득을 충분히 취한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해주기 위해 결단을 감행했다.

오늘의 정치가 대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나 싶다. 청년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과 계약직 노동자인 가운데, 코로나로 인해 실업률은 치솟으며 단순 노무 종사자의 증가로 대부분은 안정적인 수입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소득 불안은 고정 지출되는 월세 부담의 증가로 이어진다. 그런데 정치는, 당장 몇십만원을 낼 수 없어 퇴거 위협을 받는 세입자를 방치한 채 9억원이 넘는 아파트 소유자들의 월 10만원 부담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20대 1인 가구 청년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해 소득이 낮아도 주거급여 대상자에서 제외된다. 불합리한 사각지대의 해결을 정부와 여당에 요청해도 예산상의 이유로 검토조차 하지 않고 있다. ‘청년정책 기본계획’을 세울 때조차 저소득층의 주거비 부담 완화를 위한 직접적인 지원 예산은 외면받았다. 그런데 상위 4%의 주거비 부담 완화를 위한 정치의 움직임은 한없이 기민했다. 종부세를 둘러싼 오늘의 주장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잡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산의 가치는 오를 수 있다. 오른 만큼 혜택을 누리고,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지면 된다. 그것이 공정한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투기를 권장하는 나라에서, 누구도 감히 ‘부동산 영끌’을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없다. 자산양극화는 점차 심화되고 노동 소득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떨어질 것이다. 상위 4%만을 위한 정치를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더는 기대할 여유가 없다. 이 시대는 욕망을 부추기기보다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정치가 필요하다.

Posted by 아구몬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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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NGO 발언대] - 지도를 보며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_ 이한솔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5240300095#csidxfe5b5561903ea3a8962a4470711d06b 

어릴 적, 지도는 심심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보드게임 ‘부루마블’을 통해 세계 여행의 기분을 만끽하듯, 지도를 훑어보며 그 지역의 공기를 느끼고 역사와 교감했다. 문경새재를 넘어 안동 하회마을을 구경하고 경주 불국사를 방문하는, 사회 교과서가 안내하는 루트가 보통의 상상 여행지였다.

지도에서 풀내음과 바닷바람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중학교 때다. 드라마 <제5공화국>이 보여준 1980년의 5월, 광주에서 벌어진 끔찍한 비극이 다섯 편의 에피소드로 그려졌다. 드라마 방영 이후 나의 지도 속 광주엔 핏자국이 어렸다. 광주뿐만이 아니다. 관심을 가지면 지도 곳곳에 아픔이 비친다. 여수, 순천, 제주…. 지도는 피와 눈물의 역사를 땅으로 분류해 놓았다.

슬픔은 아직도 지도를 적시고 있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비극이다. 용산, 안산, 태안 등 지도에 쓰여 있는 지명 하나하나에 새로운 상처가 생기고 있다. 용산구에 이사한 첫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철길 건너편 고층 빌딩 사이로 치솟았던 용산참사의 끔찍한 화마였다. 여전히 ‘안산역’을 볼 때면,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친구와의 추억보다 세월호가 먼저 떠오른다. 연고 없는 태안은 나에게 그 자체로 김용균이다.

또 하나의 장소, 평택. 정리해고를 자행한 자본과 권력에 맞서며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이어온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300㎏의 무거운 컨테이너에 깔려 세상을 떠난 평택항의 노동자 이선호씨의 소식이 들려왔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통과된 게 불과 4개월 전인데, 보란 듯이 참사는 계속 재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사망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사람들은 노동자와 대학생, 지역과 서울, 산재와 그렇지 않은 죽음의 무게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당연하게도 지역과 참사는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 참사에 지역을 거론하는 것은 왜곡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기에 조심스러워야 함을 알고 있다. 지역의 이름보다는 참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한 제도의 개선을, 삶을 대신 살아가고 있는 유가족들의 치유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지역 명칭이 아픔으로 각인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현존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을 물들일 기세로 참사는 반복되고 있다.

나의 지도는 더 이상 슬픔으로 물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참사는 해결책이 없어서 막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관리를 위해 상식적인 수준의 비용을 지출하고, 제도를 어긴 기업이 있으면 제대로 처벌하면 된다. 우리 사회가 고작 넉 달 전의 이야기를 반복할 만큼 무능하지 않았으면 한다. 산재 사고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문재인 정부, 공약의 달성 시한은 이제 1년도 남지 않았다.

Posted by 아구몬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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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NGO 발언대] '내 집 마련'으로 기만하는 기성세대에게 _ 이한솔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3150300095

 

전혀 놀랍지 않았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3기 신도시 투기 의혹이 제기됐다. 진상규명 결과는 지켜봐야겠지만, 공직자와 특권층이 정보를 불법적으로 독점하며 벌인 투기의 역사는 강남이 개발될 때부터 50년이 넘도록 반복되었다. 변하지 않은 현실이 슬프고 분노스러움에도 기시감까지 드는 이유는, 오늘의 사태가 비단 신도시 택지 개발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 자산가들은 집을 보금자리가 아닌 투기 대상으로 삼는다. 이익을 위해 모든 자원과 편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호가 띄우기, 실거래가 허위 신고, 임대주택 공공사업에 대한 집단적 반대, 용역 깡패를 동원한 철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은 집으로 몰려들었고, 한국은 부동산 계급사회를 이룩했다.

정치는 나아가 욕망을 부추긴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후보들만 하더라도, 여야 가릴 것 없이 건물을 더 높이 올리겠다는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다주택자의 배만 불렸던 10여년 전으로 회귀한 듯하다. ‘주거 사다리’를 통해 단계적으로 집을 마련하라는 정부의 말이 무색하다. 사태를 심화시킨 사람들이 청년들만 만나면 관용어처럼 ‘내 집 마련’을 약속한다. 부동산 이슈만 터지면 너도나도 ‘청년’을 언급하고 소비한다. 높은 지지율의 대권주자는 LH 사태를 두고 ‘청년’에 ‘공정’까지 끌어왔다. ‘공정’만 하면 청년들이 집을 마련할 수 있을 것같이 눈속임을 시도한다.

미디어에서 유명한 모 건축과 교수는 칼럼에서 “청년들을 ‘월세 소작농’ 만들 텐가”라며 부동산 권력에 종속시키는 임대주택 정책을 비판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물이나 전기를 국가가 통제 및 제공한다고 해서 국민을 국가에 종속된 소작농이라고 하지 않는다. ‘집’의 공공성을 존중했다면 월세든 매매가든 적정한 수준이 되었을 것이고, 소유냐 임대냐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해지자. 현실은 천문학적인 부채를 지고 집을 사야만 하는 청년이나 월세를 내며 사는 청년이나 모두가 소작농이다. 수십년치 임금을 가불한 내 집 마련은 말마따나 ‘이자 소작’에 불과하다. 갖지 못한 게 문제가 아니다. 집에 공공성이 삭제된 것이 문제다. 정·언·학계를 불문하고 집을 절대권력으로 삼는 부동산 시장의 패러다임을 뼛속까지 내재화하여, ‘집은 소유해야 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초점이 엇나갔다.

대안은 있다. LH 직원이든 자산을 소유한 개인이든, 주택 정책을 통해 공공이 기여한 개발이익을 적절히 환수하면 된다. 시장을 교란하고 투기를 부추기는 사람들을 강하게 처벌하고, 집의 공공성을 해치는 과도한 이익을 금지하면 된다. 집을 구매할 만한 자산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임대주택에서 안정적으로 살게 지원하면 된다. 청년들이 방법을 몰라 ‘내 집 마련’을 못하는 게 아니다. 탐욕으로 가득 찬 ‘그 세대’의 산물이다.

Posted by 아구몬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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